AI 시대에 단단한 일의 조건
매슈 B. 크로퍼드의 "손으로, 생각하기"를 다시 읽다
나는 평소 메모를 많이 한다. 생각이 복잡할수록 노트에 적어 정리한다. 몇 년 전 "손으로, 생각하기"를 샀을 때도 그런 책인 줄 알았다. 손으로 쓰며 생각을 정리하는 법을 다룬 책이라고 생각했다.
몇 장 읽다가 덮었다. 내가 찾던 내용과 달랐다. 그렇게 몇 년을 책장에 두었다가 최근 다시 펼쳤다. AI가 일의 모습을 바꾸기 시작한 지금은 전과 다른 책으로 읽혔다.
저자인 매슈 B. 크로퍼드는 워싱턴 D.C의 한 싱크탱크를 다섯 달 만에 그만두고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작은 정비소를 열었다. 시카고대학교에서 정치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가 선택한 일은 모터사이클 정비였다.
이 선택은 지식노동에서 육체노동으로 내려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크로퍼드는 반대로 느꼈다. 책상 앞에서는 이미 정해진 방향에 맞는 자료를 찾고 문서를 만드는 일을 했지만 정비소에서는 자신의 판단으로 문제를 풀어야 했다.
그는 생각하는 일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더 많이 생각해야 하는 일로 옮겨갔다.
그는 그 경험을 2006년 에세이"Shop Class as Soulcraft"에 썼고 2009년 같은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우리나라에서는 "손으로, 생각하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크로퍼드가 본 것은 손노동의 우월함이 아니었다. 사람의 판단이 일에서 분리되는 과정이었다.
이 글에서 말하는 단단한 일은 AI가 영원히 대신하지 못하는 일이 아니다. 판단과 실행과 결과 확인을 서로 떼어낼수록 품질이 떨어지는 일이다.
오늘 나는 무엇을 바꾸었는가
크로퍼드가 싱크탱크에서 느낀 불편함은 급여나 직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루 종일 자료를 읽고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자신의 일이 누구에게 어떤 변화를 만들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노동의 과정은 있었지만 결과와의 연결은 보이지 않았다.
퇴근길에 남는 질문은 단순했다.
오늘 나는 무엇을 바꾸었는가.
AI가 결과물을 빠르게 만드는 지금 이 질문은 더 중요해졌다.
보고서를 만들고, 회의에 참석하고, 이메일을 전달한다. 회의 내용을 요약한 뒤 다른 문서에 옮긴다. 모두 바쁘게 일하지만 그 일이 고객과 제품에 어떤 변화를 만드는지는 알기 어려워진다.
나도 조직이 커지는 동안 비슷한 장면을 여러 번 봤다. 바쁘게 일하면서도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일을 나누자 속도는 빨라졌다. 기획자는 문서를 만들고, 개발자는 전달받은 티켓을 처리하고, 운영자는 정해진 기준에 따라 고객에게 답했다. 각자의 업무는 분명해졌지만 고객의 문제가 어디에서 시작해 어떻게 끝났는지 아는 사람은 줄었다.
조직은 그렇게 일을 잘게 나눈 뒤 다시 주인의식과 창의성을 요구했다.
크로퍼드가 문제 삼은 것도 사무직과 기술직의 차이가 아니었다. 그가 본 문제는 판단과 실행의 분리였다.
공장의 조립 노동자는 손을 사용하지만 스스로 판단할 일은 거의 없을 수 있다. 반대로 연구자나 교사, 현장 영업 담당자, 제품 책임자는 책상 앞에서 일해도 자신이 내린 판단의 결과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반대로 공구를 들지 않는 일에도 판단과 실행을 나누기 어려운 일이 있다. 제품 책임자는 계획만 세우고 일을 끝낼 수 없다. 고객의 반응과 실제 사용 결과를 본 뒤 처음 정의한 문제와 제품의 방향을 다시 판단한다.
중요한 것은 몸을 쓰느냐가 아니다.
자신의 판단이 실행으로 이어지는가. 그 결과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가.
조직이 숙련자의 지식을 공정과 매뉴얼에 담으면 노동자는 전체를 이해하는 대신 정해진 절차만 따른다. 크로퍼드는 공장 노동에서 나타난 이 분리가 지식노동에도 이어진다고 보았다.
AI는 이 구조를 새로 만들지 않았다
AI는 문서를 작성하고, 회의 내용을 요약하고, 정보를 분류하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수정한다.
사람들은 AI를 주로 코딩과 글쓰기, 교육과 사무/관리 업무에 쓴다. 대부분 화면 안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다.
AI가 일자리 전체를 얼마나 빠르게 바꿀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다만 AI가 조직 안에서 무엇부터 값싸게 만들고 있는지는 보인다.
이미 디지털화된 일, 일정한 절차로 나눌 수 있는 일, 구체적인 맥락과 책임에서 떼어내 화면 위에서 평가할 수 있는 일이다.
조직이 이미 잘게 나눈 일을 AI가 더 싸고 빠르게 처리할 뿐이다. 판단을 매뉴얼과 시스템에 담고 실행을 작은 단위로 나눠도 결과가 유지되는 일일수록 AI가 맡기 쉽다.
직업 전체를 한꺼번에 없애기보다 그 안의 일을 하나씩 맡는다. 정보를 전달하고 정리하며 정해진 형식에 맞추는 일의 가치는 줄어든다. 반면 문제를 정의하고, 예외를 판단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결과에 책임지는 일의 가치는 커진다.
과거 조직은 장인의 판단을 공정과 매뉴얼에 담았다. 이제는 전문가의 판단 일부도 시스템에 넣고 있다.
손보다 중요한 것은 판단이다
그렇다면 손을 쓰는 기술직은 AI로부터 안전할까.
그렇지는 않다.
기계는 반복적이고 표준화된 손노동을 오래전부터 대신해왔다. 공장의 조립 노동은 육체를 사용하지만 판단과 실행이 분리된 노동의 대표적인 사례다.
기술직이 상대적으로 자동화되기 어려운 이유는 손을 써서가 아니다.
현장에서 매번 다른 상황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터사이클의 고장을 진단하는 일은 매뉴얼을 순서대로 적용하는 작업과 다르다.
고객의 설명은 불완전할 수 있다. 같은 소음도 원인이 다를 수 있다. 이전 수리의 흔적이 새로운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정비사는 엔진의 소리와 진동, 열과 냄새, 부품의 마모와 정비 이력을 함께 살핀다.
작업을 시작한 뒤 새로운 정보가 나오면 처음 세운 가설을 바꾼다. 수리가 끝나면 문제가 해결됐는지 확인한다. 정비소 밖으로 나간 모터사이클이 다시 달릴 수 있어야 일이 끝난다.
AI도 센서 데이터를 분석해 이상을 찾고 고장을 예측할 수 있다. 로봇이 발전하면 물리적인 작업의 일부도 맡게 될 것이다. 지금 AI가 못하는 일만으로 사람의 역할을 설명할 수는 없다.
핵심은 AI가 듣거나 보지 못한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를 찾고 원인을 추정하고 직접 고친 뒤 결과를 확인하는 전 과정을 한꺼번에 대신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AI가 엔진의 이상음을 분류하는 것과 고장 난 모터사이클을 다시 달리게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 기준에서 보면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의 구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손을 사용하더라도 미리 정해진 동작을 반복하고 판단과 결과에서 분리된 일은 자동화에 취약하다. 반대로 공구를 들지 않아도 자신의 판단이 사람과 제품에 직접 영향을 주고 그 결과를 확인하는 일도 있다.
문제부터 정해야 하는가.
실행하면서 새로 드러난 정보에 따라 판단을 바꿔야 하는가.
일의 끝이 문서 제출이 아니라 현실에서 확인되는가.
판단한 사람이 그 결과까지 직접 보고 책임지는가.
AI가 쉽게 대체하기 어려운 일은 손을 쓰는 일이 아니다.
문제를 정하고 실행하면서 판단을 고치고 결과까지 확인해야 하는 일이다.
크로퍼드는 정비소로 가며 지식을 버리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이 무엇을 바꾸는지 알기 어려운 일 대신 문제를 직접 고치고 결과까지 확인하는 일을 택했다.
Comments ()